“저것이 근대화예요?”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시리즈에서 3권은 1960년대 근대화의 시작을 알린다. 전쟁과 해방 그리고 근대화. 20년 사이에 시대는 급속히 달라졌다. 자본주의가 중심이 되면서 서민들은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느라 혼란을 겪고, 그 혼란 속에서 근대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시기였다. 이 책은 초반에는 전쟁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중반에는 4.19 혁명과 정권 교체에 따르는 혼란을, 후반에는 예술가와 일반 서민들의 흘러가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중에서 이제하의 〈유자약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예술가는 시대의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론이나 해석이 나오기 전 먼저 변화를 체감하고 작품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감수성이 예민하다. 작가 이제하는 1937년생으로, 중학교 3학년 때 《학원》에 독자 투고하여 〈비 오는 날〉로 우수상을 수상한다. 성인이 된 후 《새벗》이라는 어린이 잡지에 〈수정구슬〉이 당선되고, 《현대문학》에 시 〈노을〉이 발표되었고, 《신태양》에 〈황색 강아지〉가 실리면서 등단했다. 그는 홍대 조소과에 입학했지만 군 제대 후 서양화과로 다시 들어간다. 소설, 시, 동화, 시나리오 등 문학의 모든 분야와 화가로서 전시회도 열며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전방위로 장르를 넘나드는 이제하를 황석영은 ‘한국의 장 콕토’라고 칭한다. 예술의 최전방에서 예술가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소설로 혼란을 썼다. 이야기는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문유자라는 여성이 주축이 되고 그녀와 함께한 대화와 나(지섭)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지인의 부탁으로 함께 하게 된 유자에게 지섭은 호기심을 갖는다. 14시간 동안 잠을 자거나 갑작스러운 말을 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유자. 하지만 지섭은 불현듯 유자를 연상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고 이끌림을 느낀다. 유자와 대화를 하다가 유자의 도발에 지섭은 유자의 뺨을 때리고 현실의 두려움을 터트리기도 한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지섭은 유자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후반부에 이르러 정신병원에 갔던 시인과 만남에서 유자는 “저것이 근대화예요?” 하고 묻는다. 그리고 유자가 죽고 나서 지섭은 그녀의 죽음을 허무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이제하는 내면에서 ‘유자’라는 아바타를 끌어내어 초현실주의적 대화놀이를 하면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훼손된 예술가의 삶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는 이미 쓸모없고 ‘생산물’도 낳지 못한다. ‘나’는 어느 공간과 상황 속에서도 똑같지 않은 유자를 허섭스레기의 사물화된 세상 속에 배치하는 상상력을 통해서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한 예술가와 그의 생을 기형적으로 보여주려 한다.”(277p)작가는 유자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 당시 ‘근대화’라는 개념 자체로 보인다. ‘나’는 변화하는 현재 상황에 호기심이 있다. 하지만 뭔가 바뀐 것을 대략은 알겠지만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연속된다. 부정하고 싶지만 갇혀있는 나와는 다르게 펼쳐진 세계(미술사조와 이론을 중시하는 나와는 다르게 유자는 개방적으로 차용하고 자유롭게 그린다). 그러다 갑자기 그 세계가 사라져버렸다. 우리에게 이미 스며버린 것인지 죽어 없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유자는 새로운 내적 존재를 눈뜨게 했음이 틀림없다.
염상섭부터 김애란까지,
거장 황석영과 함께 걷는 한국문학 100년의 숲
1962년 등단, 오십여 년 한결같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온 거장 황석영이 지난 100년간 발표된 한국 소설문학 작품들 가운데 직접 가려 뽑은 빼어난 단편 101편과 그가 전하는 우리 문학 이야기. 작가 황석영이 온몸으로 겪어낸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작품들은 그만의 시선으로 새롭게 부활했고, 오늘의 작품들은 그 깊이가 달라졌다.
긴 시간 현역작가로 활동해온 그이기에, 그리고 당대와 언제나 함께 호흡해온 그이기에 가능한 ‘황석영의 한국문학 읽기’! 특유의 입담과 깊이 있는 통찰, 과거와 오늘의 작품을 새로 읽는 데 있어 반성을 주저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우리 문학에 다가서기 어려워하는 독자들까지도 작품 곁으로 성큼 이끌어준다.
기존의 국문학사나 세간의 평가에 의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현재 독자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선정된 작품들에는 유명한 작가의 지명도 높은 단편뿐만 아니라 지금은 거의 잊힌 작가의 숨은 단편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각 권의 말미에는 시대와 작품을 아우르는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해설이 덧붙여져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했다.
펴내며
누구에게나 일생에 절창은 하나씩 있다 _004
박경리, 「불신시대」 _013
나를 지켜준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_045
오영수, 「명암明暗」 _055
사람 사이의 정에 대하여 _082
송병수, 「쑈리 킴」 _089
이름조차 달라진 아이들 _112
하근찬, 「수난 이대」 _117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_133
천승세, 「포대령砲大領」 _139
좋아, 본관은 전사다! _164
박태순, 「무너진 극장」 _171
혁명은 의연히 진행중이다 _192
최인훈, 「웃음소리」 _201
환상을 몸통으로, 현실을 그림자로 _218
이제하, 「유자약전劉子略傳」 _227
일그러진 세상의 예술가 _269
서정인, 「강」 _279
물처럼 흘러가는 쓸쓸한 인생 _300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_307
갑자기 늙어버린 스물다섯 살 _332
해설 | 신수정(문학평론가)
잔인하지만 인생이란 그런 것 _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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